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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상징 `석탑`,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잊혀졌을까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2021.08.22 Views 648

고려대의 상징 `석탑`,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잊혀졌을까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보성전문학교 초대 도서관장 손진태

 

- 1편 세계 5대 동양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 조선인에서 이어집니다.

 

고려대는 석탑대동제, 석탑문학, 석탑가족처럼 `석탑`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1976년 고려대 동문 박희진이 지은 <고대찬가>라는 시에도 `석탑`은 등장한다.

 

"저 수려한 / 화강암 석탑의 지성을 보라 / 누가 마음의 고향을 안 느끼랴 / 누가 희망으로 부풀지 아니하랴"

 

고려대 캠퍼스 자체가 석조 건물 위주이긴 하나, `석탑`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따로 있다. 대학원 건물과 도서관으로 쓰이는 `중앙도서관 구관`이다. 중앙도서관 구관은 가장 먼저 지은 본관보다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 건물의 5층 중앙탑은 우뚝 솟아, 캠퍼스 어디에서나 석탑의 위용을 자랑한다.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은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에 "개교 30주년 기념 도서관"이라는 명패가 새겨져 있다.

 

고려대 상징 `석탑`은 어디를 말할까



듀크대 퍼킨스 도서관 듀크대학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시에 있는 연구 중심 대학이다. 문리대인 트리니티 대학과 공과대인 프랫 공대로 나뉘어 있다.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은 듀크대 퍼킨스 도서관을 모델로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Wikipedia

 

보성전문 도서관은 인촌 김성수 개인의 사재로 건립된 도서관이 아니다. 전국적인 모금을 통해 건립비용을 마련했다. 120명이 넘는 사람이 모금에 참여해서 12만 원 이상 비용을 모았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각각 2만 원씩,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자 우석 김종익이 12천 원, 송진우 2백 원, 현상윤 1백 원, 이병도 1백 원, 유진오 70, 안호상 50, 정인보가 10원을 기부했다.

 

조지훈이 쓴 고려대 교가 가사에는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 올린 공든 탑"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조지훈이 말한 `공든 탑`은 바로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을 의미한다. 동문 모금을 통해 도서관을 건립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전국적 모금으로 대학도서관을 지은 사례는 흔치 않다.

 

19356월 공사를 시작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은 19379월 완공했다.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이 도서관은, 1934년 완공된 본관에 이어 고려대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긴 건축물이다. 고려대 김현섭 교수가 밝힌 것처럼, 보성전문 도서관은 1930년 문을 연 듀크대(Duke University) 퍼킨스 도서관(Perkins Library)을 모델로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보성전문이 도서관 건립을 추진한 이유는, 서고와 학생 열람실, 교수 연구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유진오는 자신의 부임 조건으로 1교수 1연구실을 내걸었고, 인촌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구관은 지금도 일부 공간이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존하는 대학도서관 중에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 바로 이곳이다. 말 그대로 한국 대학도서관 건축물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만하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신관` 역시 역사가 짧지 않다. 개교 70주년 기념으로 1978년 문을 연 중앙도서관 신관은, 2018년 개관 40주년을 맞았다.

 

1970년대 후반 일본 석조건축 전문가 그룹이 한국의 석조건축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석조건축 전문가들은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청사), 덕수궁 석조전,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을 `한국의 3대 석조건축물`로 꼽았다.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은 사적 286호다.

 

보성전문 도서관 분류표를 만든 장본인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도서 수입 원부> 손진태는 로마자와 아라비아숫자를 조합해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 만들었다. 이런 조합으로 만든 분류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분류표는, 미국 의회도서관(LC) 분류표다. 손진태가 의회도서관 분류표를 참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도요문고 분류표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손진태의 <분류표>가 적용된 첫 번째 책은, 등록번호 74<보도 타삼편>(세계대중문학전집)이다. 손진태는 <도서 수입 원부> 해당 자료에 분류기호 ‘G42’를 부여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1939년 손진태는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교수로 그는 문명사를 가르쳤다. 도서관장도 계속 맡았다. 손진태가 머문 도서관장실은 보성전문 도서관 1층에 있었다. 비슷한 시기 그는 민속품을 수집해서 보성전문학교 박물관을 출범시켰다. 인촌 김성수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손진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박물관의 기초를 닦았다.

 

보성전문 교수가 된 후 손진태는 안호상, 조윤제, 이인영과 가까이 지냈다. 보성전문 교수로 안암동에 가까이 살았던 손진태와 안호상은 술자리도 자주 하는 사이였다. 손진태는 조윤제와 이인영에게 도서관 연구실도 제공했다.

 

도서관장으로 일하면서 손진태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도서관은 도서관마다 제각각 분류표를 사용했다. 손진태가 만든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 한국인이 만들고 작성자가 알려진 분류표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분류표로 보인다.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는 손진태가 도서관장이 된 1937년 즈음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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